길고도 험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각계각층은 윤석열 이후의 세상을 이미 꿈꾸고 있습니다. 윤석열 이후 노동정책은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지 가닥을 잡아봅니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탄압)이라면
첫 번째는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등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과 여론몰이가 있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최소한의 운임을 보장하라는 화물연대의 외침을 무시했고 행정명령 행사를 언급하며 파업을 무력화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건설노조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박과 여론몰이가 있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양회동 열사는 죽음으로 맞섰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건설 현장의 무제한 하도급 문제와 열악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건설노조의 노력을 ‘건폭’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탄압했습니다. 전국 곳곳의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이 있었고 경찰들은 조합 간부들을 공갈 협박범으로 몰아 체포했습니다. 수년이 지나서 모두 무죄임이 밝혀졌음에도 ‘건폭 ’몰이의 주범인 윤석열과 원희룡에 대한 처벌은 없었습니다. 양회동 열사의 죽음 이후 분노한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투쟁을 떠올려 보면 윤석열 파면의 결정이 열사에게도 전해졌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근로시간에 대한 개악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도체특별법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무제한의 노동이 가능하도록 시도했습니다. (이는 민주당 역시 책임이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1주 12시간으로 제한된 연장근로의 체계를 뒤집어엎어서 분기, 반기, 연 단위로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1주 12시간이라는 벽을 허물고자 했습니다. 하루에 평균 10시간을 근무하게 된다고 생각해봅시다. 9시에 출근하기 위해 7시 일어나 만원인 지하철에 몸을 맡깁니다. 8시간을 근무하여 6시가 되었지만, 2시간이 더 남았습니다. 30분 만에 식사를 해결하고 8시 30분이 돼서야 퇴근하여 10시 무렵 집에 도착합니다. 1주 12시간만 해도 이미 임계점에 다다른 상황인데 여기서 더 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출근한다고 지하철을 탔던 남편은 잠든 상태로 종점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위험한 활선 업무를 수행하는 남편은 아침에 깨지 못했습니다. 경영평가로 압박을 받던 남편은 간밤에 잠을 설치더니 깨지 못했고, 정년을 얼마 앞둔 아내는 아침부터 두통을 호소했으나 일을 마치고 병원에 갔으나 이미 뇌출혈이 한참 진행되었습니다. 맥도날드에서 일하던 엄마는 잠시 쉬려고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몇 년째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장시간 노동과 스트레스로 인해 뇌와 심장에 질환이 발생한 사례들이고 최근 1~2년 사이에 제가 접했던 것들입니다. 1주 52시간까지 근무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사람이 아프고 쓰러집니다. 윤석열은 1주에 100시간도 근무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본인이 감옥에서 ‘장기간’ 노역을 그렇게 살면서 다시금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노조법 개정에 대한 거부권 행사입니다. 지난 ‘노동톡톡’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진짜 사장과 교섭할 수 있어야 실질적인 노동조건 향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노동조합은 투쟁과 교섭을 통해 장기간 지속된 저임금 체계를 조금씩 허물 수 있었습니다. 두둑해진 급여 봉투를 보고 노동자는 “임금을 1,000원짜리로 지급한 줄 알았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사용자는 그들의 몫이 노동조합에 빼앗기자 머리를 씁니다. 어용노조를 만들었고 가짜 사장을 만들어서 노동조합의 힘을 없애버립니다. 수백억의 손해배상 청구를 통해 조합을 탄압했고 노동자들은 고공농성을 넘어 자신을 좁은 철창 속에 가두어가며 싸워야 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그나마 노동조합이 균형을 맞추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그렇기에 노조법 개정을 통하여 누구든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용자는 교섭에 나서야 합니다.
윤석열이 사라진 자리를 누군가 채울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자와 노동 탄압을 자행하는 자가 채우지 못 하게 해야 합니다. 윤석열 이후의 노동은 장시간 노동, 저임금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봅니다. |